2020년 마태복음 제23강

말씀 마태복음 15:1-28  (요절 마태복음 15:19,20)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15:19,20)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1절에서 20절까지는 선민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진 유대인이요, 장로들의 전통을 열심히 지키며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자부심과 자기의가 가득차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마음이 딱딱하고 비판적이었습니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인 맹인과 같았습니다.  반면에 21-28절에 나오는 가나안 여자는 유대인들이 개라고 부르며 무시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장로들의 전통과 율법과는 무관한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들보다는 잘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즉 구원자로 영접했습니다. 자신의 심각한 인생 문제를 들고 나아왔습니다. 모욕을 당하면서도 겸손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끝까지 겸손하게 간구함으로 예수님께 네 믿음이 크도다 하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어떤 믿음을 기뻐하시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최고 통치 기관인 산헤드린으로부터 파견된 자들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대제사장이 의장이며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장로 등 70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로마 통치하에서도 정치 문제와 사형권을 제외한 입법과 사법을 총괄하는 최고 정책 의결 기구였습니다. 주로 율법을 해석하고 종교 재판을 주관하며, 성전의 치안을 유지하는 문제들을 다루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자 이를 조사하기 위해 조사관을 파견했습니다. 이들은 눈을 똑바로 뜨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관찰했습니다. 이 때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이 모습을 보고 분개하며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을 검사하는 것은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잘 하는 것입니다. 이는 위생적인 목적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신앙적인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장로들의 전통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주신 율법을 실생활에 잘 적용하기 위해 생겨났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하는 전통은 출30:19, 20절 “19)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20)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제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화제를 사를 때에도 그리 할지니라” 말씀에 기초한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성소 앞에 있는 물두멍에서 물을 떠서 손과 발을 씻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함부로 나아가지 않고 경건한 마음으로 나아가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장로들은 이 율법을  일반인들도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도록 확대하여 적용하였습니다. 이런 전통은 강대국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고 용광로 같은 이방 문화의 도전을 받는 위기 속에서 신앙적인 정체성을 지키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그 본래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형식만 남았습니다. 마가복음 7:3,4을 보면 당시 유대인들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3) 바리새파 사람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손을 씻기 전에는 결코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이것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는 것입니다. 4) 시장에서 돌아오면 자신들의 몸을 깨끗하게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지켜야 할 일이 많았는데 컵이나 주전자, 냄비 그릇 그리고 침대를 씻는 것이었습니다.”(쉬운성경). 바리새인들은 이 외에도 정결한 음식만 먹기(코셔), 십일조, 금식 등을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지켰기 때문에 자신들을 의롭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를 지키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월의식을 가졌습니다. 잘 지키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판단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방인들을 부정하다고 멀리하고 창기와 세리 같은 자들을 정죄하였습니다. 이들의 이런 교만과 자기의는 예수님을 통해 일반 백성들과 죄인들 중에 일어나는 생명과 빛의 역사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교만한 그들이 얼마나 죄인들인지 실체를 드러내십니다. 3절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3)고 책망하십니다. 장로들의 전통 중에 ‘고르반’이라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이는 “헌물‘,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재산 중에 일부나 또는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을 하면은 그 재산은 반드시 하나님께 서원한대로 드리도록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반드시 갚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중에 재산이 아까운 마음이 들어 드리지 않는다든지, 가세가 기울었을 때 채권자들이 가져가게 되면, 이는 하나님께 대한 자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이 고르반 전통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소출이 많은 포도밭이 있어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소출을 부모에게 드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포도밭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고르반‘이라고 선언을 하면,  소출로 부모를 봉양하지 않아도 비난을 받지 않았습니다.  서원을 언제까지 갚아야 한다는 기한도 없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자신이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행위는 십계명 중에 5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20:12)하신 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장로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전통도 하나님의 말씀 보다는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 전통이 처음에 의도하였던 본래의 정신을 잃지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율법과 형식과 같이 외적으로 드러난 것보다도 그 사람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형식으로 자신들을 겉모습만 종교적으로 치장하고 있는 그들을 이사야서 29장 13절 말씀을 인용하여  책망하십니다. 7절-9절 ”7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계서 멀도다 9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7절과 8절에서 그들의 특징은 외식과 입술로 하는 경배였습니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았습니다. 안식일도 철저히 지켰고, 유월절이나 초막절 같은 절기도 잘 지켰습니다. 기도 시간에 맞쳐 하루 세 번 기도를 열심을 가진 바리새인들은 일 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했습니다. 십일조도 철저히 계산하여 내고 하나님께 많은 제물도 드렸습니다. 또 입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외우고 가르쳤습니다. 기도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외적으로나 입술로는 신앙생활을 잘 하였지만, 8절을 보면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사람들의 인정과 자신의 명예와, 물질과 같은 자기와 세상에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진리에 기초한 책망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교만한 마음으로 분노하며 어찌하든지 예수님을 트집을 잡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서 영적인 맹인이요, 하나님이 심은 나무가 아니므로 뽑힐 것이라 경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습에 속지 않고 마음을 보십니다. 삼상(16:7b)  “내가 보는 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 같지 않다. 사람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여호와는 마음을 본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신명기(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명령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위기의 때나 축복의 때나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기를 힘썼습니다. 위기의 때에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시편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통일 이스라엘의 왕국의 왕이 되는 축복의 때에는 그 왕국의 중심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고자 애를 썼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자 왕의 체면을 벗어던지고 힘을 다해서 춤을 추웠습니다. 자신은 화려한 궁전에 살고 있는데 하나님의 언약궤는 성막 안에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아름다운 성전을 짓고자 하였습니다. 다윗은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의 마음에 죄악된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17:9) 인간의 마음에 대하여“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들이 부패한 마음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십니다. “(19)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20)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부패한 인간의 마음을 깨끗하게 씻을 수 있습니까? 금식이나 고행을 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고 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부패한 마음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거듭나게 해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에 마음의 참된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36:25-27 “(36:25)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36: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약속하셨습니다. 사람 속에 새 영을 부어 주셔서 마음을 부드러운 살같이 바꾸어 주시고 하나님의 법을 따르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인간의 죄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는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에게 임합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애통하는 사람,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자신의 의지나 노력으로는 해결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사람,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저는 겉보기에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인 것처럼 보입니다. 저도 사람들이 저의 겉모습을 보고 그렇게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내면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청년 시절 어느날 골목길에서 힘없고 약한 사람을 마주쳤는데 그 때 저의 마음 속에 그를 폭행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에 스스로 놀랐습니다. 이 외에 정욕적인 생각과 이로 인해 생긴 수치심으로 대인 공포증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몸의 더러움은 씻을 수 있지만 내면의 씻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답답하였습니다. 그런 중 말씀 공부와 예수님의 사죄의 은혜는 마음에 평강을 주고 죄와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이런 은혜로 인해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에는 부족한 자의 심정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공부하다가 바리새인 부분이 나오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언제 부턴가 바리새인이 이해 되기 시작했습니다. 바리새인처럼 교회에서 하는 일들을 마음 없이 하고, 가정이나 직장에서는 자기감정과 세상 조류대로 살았습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살피고 마음을 드리고 마음을 깨끗이 하는데 힘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의 논쟁을 벌였던 갈리리 지역을 떠나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습니다(21). 두로와 시돈 지방은 갈릴리 북서쪽으로 약50km 떨어진 곳으로 이방 지역입니다. 시돈은 바알과 아스다롯 우상숭배의 본거지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의 종교지도자들과의 불필요한 긴장관계를 피하고 제자양성에 집중하시고자 조용한 곳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나안인으로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녀에게는 흉악하게 귀신들린 딸이 있었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감기 몸살만 걸려도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하물며 귀신들려 발작을 하고 흉악한 증상을 보이는 딸을 볼 때 여인의 마음은 아프고 절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이 자기가 사는 곳 가까이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계시다는 곳을 찾아와서 소리 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들렸나이다” 한 번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계속해서 소리 질렀습니다. 여자는 예수님을 부를 때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여인은 이방인이었지만 소문을 통해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평소 믿음으로 나아온 자들은 어떤 자라도 기쁨으로 영접하시고 축복해주셨습니다. 냄새나고 더러운 문둥병자에게는 손을 대시며 고쳐주셨습니다. 믿음으로 옷 깃만 스친 여인의 병도 낫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절박한 심정과 믿음으로 나아온 이 여인의 간구에 대해서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를 통해 주님은 때로 우리의 기도에 침묵하시기도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침묵은 거절이 아니고 침묵을 통해서도 무엇인가를 말씀해주십니다. 침묵 안에도 선하신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이 믿음으로 나아온 것을 기뻐하시고 그녀의 믿음을 더욱 키우시고자 하셨습니다. 또 이 여인의 위대한 믿음을 본보기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말씀도 하지 않으실 때 거절하신 것으로 생각하고 그만 둘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계속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자가 뒤에서 시끄럽게 소리치니 보내어 달라고 부탁 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간절하게 외치는데 예수님께서 침묵을 깨고 하신 말씀이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하셨습니다. 이는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을 통해 복음이 완성되고 이후에 이방 세계로 복음이 전파되는 구원 역사의 원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여인에게는 한 마디로 “너는 이방인이라 안된다”는 거절의 말씀으로 들릴 수 있었습니다. 여인은 마음에 상처를 입고 물러갈 수도 있을 법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자 여인은 오히려 제자들의 뒤에 있다가 예수님의 앞으로 나아와 꿇어 엎드려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 간구하였습니다. 그녀는 더욱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께는 경배의 자세를 보이며 더욱 간절하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세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더욱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이는 이제까지 어떤 말 보다도 심한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선민이라는 자부심 때문에 이방인들을 개취급하였습니다. 아마 여인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마저 자신이 유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개 취급하실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구하였는데도 오히려 무시하면 그만큼 더 감정이 상하고 감정적이 되기 싶습니다. 개 맛을 보여주겠다며 미친 개럼 대들기 쉬웠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빵을 손으로 찢어 먹었습니다. 그러므로 빵 부스러기가 잘 생겼습니다. 개들이 이 부스러기를 주어먹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여인은 이방인으로서 정당하게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개들이 먹는 부스러기 은혜를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여인의 대답을 들으시고 크게 감동받으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러자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원어에 보면 여자여 앞에 감탄사 ‘오’가 붙어있습니다. 여인은 유대인들이 개로 여기는 이방인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가나안 여자가 어떻게 침묵과 겉보기에 부정적으로 들리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나아갈 수 있었을까요? 첫째로 주권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왜 유대인에게 먼저 은혜를 주시고, 나는 이방인이라 차별하느냐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 방법으로 인정하였습니다. 다른 여자의 자식은 건강하게 자라서 생일날 명품 백까지 선물을 했다는데, 내 자식은 왜 이러냐고 불평하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있는 선하신 주권을 믿고 인정하였습니다. 이는 운명적인 것과는 다릅니다. 요셉은 색동옷을 입으며 12아들 중 가장 사랑 받는 자식으로 자라다가 졸지에 형제들에게 버림을 받고 노예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보디발 여사로 인해 억울하게 감옥에 갈 때도, 은혜를 베푼 관원장이 은혜를 까먹었을 때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열심히 일하며 섬겼습니다. 여인도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었기 때문에, 언제가 선한 역사를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끝까지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의 역사를 믿고 부스러기 은혜를 구했습니다. 평소 우리는 은혜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은혜를 구한다는 말 자체에는 내가 받을 자격이 없는 데 받아야만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여자는 이방인으로서 받을 자격이 없지만 긍휼의 주님을 바라보고 부스러기 은혜를 구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통해 긍휼히 풍성하심을 알고 불쌍히 여겨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도 자격이 없지만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여 나아갈 때입니다. 주님 저는 율법도 잘 지키지 못하고 그렇다고 마음도 깨끗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은혜가 없으면 절망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할 때입니다. 


셋째로, 딸에 대한 어미의 심정 때문입니다. 여자는 예수님께 나아가 기도할 때, 딸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지않았습니다. 딸이 젊은 나이에 너무 불쌍해요 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였습니다.” 여인이 딸과 하나가 되어 딸의 문제를 자기의 문제로 끌어안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딸을 꼭 낫게 해야만 한다는 절박함은 자신을 낮추어서라도 점점 예수님께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고통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고 어찌하든지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은 주님의 마음을 닮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불쌍히 여기는 어미의 심정, 목자의 심정을 가진자들을 기뻐하시고 축복해주십니다. 



말씀을 통해 형식적이고 율법적인 신앙생활 보다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고자 애쓰는 믿음,  선하신 주권을 믿고 겸손하게 나아오는 믿음, 양들을 불쌍히 여기고 어찌하든지 돕고자 하는 믿음을 예수님께서 기뻐하심을 배우게 됩니다. 저희가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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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23 

말씀 마태복음 15:1-28

요절 마태복음 15:19,20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1.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무슨 문제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했습니까(1,2)? 예수님은 어떤 예를 들어서 그들의 잘못된 신앙을 지적하셨습니까(3-6)? 선지자 이사야는 그들의 외식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예언했습니까(7-9)?

 

 

 

2.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10,11)? 하나님이 심으시지 않은 것은 다 어떻게 됩니까(12,13)?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누구와 같았습니까(14)?

 

 

 

3.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15-18)? (참조 렘17:9) 마음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19,20)? 사람이 어떻게 깨끗하게 될 수 있습니까? (참조 겔36:24-27; 9:13,14; 요일1:7a-9; 3:4-7)

 

 

 

4.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무슨 간청을 했습니까(21,22)? 그녀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었습니까예수님은 왜 여인에게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까(23,24)?

 

 

 

5. 여자의 거듭된 간구에 예수님은 어떤 모욕적인 말씀을 하셨습니까(25,26)? 여자는 예수님의 모욕적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27)? 어떤 점에서 여자의 믿음이 크며예수님은 이런 여자의 큰 믿음을 어떻게 축복하셨습니까(28)?